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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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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는 바사 왕조 출신으로, 1632년부터 1648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이었다. 그는 러시아 차르로 추대되기도 했으나 동방 정교회 개종 거부로 무산되었으며, 스몰렌스크 전쟁에서 승리하고 스웨덴과의 분쟁을 종결하는 등 군사적, 외교적 활동을 펼쳤다. 예술 후원자로서도 활동하며 폴란드의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나, 슐라흐타의 반대로 왕권 강화에 실패하고, 1648년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반란 중에 사망했다. 그의 치세는 왕권 제한과 잦은 정책 실패로 평가받으며,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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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피터 폴 루벤스가 그린 브와디스와프 바사 초상화 (1620년대)
피터 폴 루벤스가 그린 초상화 (1620년대)
통치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즉위1632년 11월 8일
대관식1633년 2월 6일
선임자지그문트 3세 바사
후임자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러시아 차르 (주장)재위: 1610년 7월 19일 – 1613년 2월 21일
선임자: 바실리 4세
후임자: 미하일 1세
출생일1595년 6월 9일
출생지워프조프, 폴란드 왕관령,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사망일1648년 5월 20일
사망지메르키네,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매장지바벨 대성당, 크라쿠프, 빌뉴스 대성당, 빌뉴스 (심장)
종교로마 가톨릭교
서명
칭호
폴란드어Władysław IV Waza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리투아니아어Vladislovas Vaza (블라디슬로바스 바자)
스웨덴어Vladislav IV av Polen (블라디슬라프 4세 아브 폴렌)
러시아어Владислав IV Ваза (블라디슬라프 4세 바자)
라틴어Ladislaus IV Vasa (라디슬라우스 4세 바사)
가문
왕가바사 가문
아버지지그문트 3세 바사
어머니안나 폰 외스터라이히 (폴란드 왕비)
결혼과 자녀
배우자체칠리아 레나타 폰 외스터라이히 (1637년 9월 12일 결혼, 1644년 3월 24일 사망)
마리아 루이자 곤차가 (1646년 결혼)
자녀지그문트 카지미에시 바사
마리아 안나 이사벨라
브와디스와프 콘스탄티 바사 (사생아)

2. 생애

링크


안나 아우스트리아와 지그문트 3세 바사의 결혼은 바사 왕조를 합스부르크 왕가와 연결하려는 정략결혼이었다. 브와디스와프는 1595년 6월 9일 크라쿠프 근처 워브주프의 국왕 여름 별장에서 태어났다.

브와디스와프의 어머니는 1598년 2월 10일에 사망했고, 그는 어머니의 궁정 시녀였던 우르술라 마이에린에게 양육되었다. 우르술라는 왕실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브와디스와프의 호프마이스터는 폴란드-프로이센 귀족인 미하우 코나르스키였다. 17세기 초, 브와디스와프가 마레크 웽트코프스키, 가브리엘 프로방유시, 안제이 숄드르스키, 지그문트 카자노프스키 등의 새로운 교사들을 얻으면서 우르술라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그의 교육은 피오트르 스카르가 신부가 설계했을 가능성이 높다. 브와디스와프는 크라쿠프 아카데미와 로마에서 공부했다.

10세 때, 그는 자신만의 왕자 궁정을 받았다. 그는 아담 카자노프스키, 스타니스와프 카자노프스키 형제와 우정을 쌓았다. 그는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이후 예술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를 구사했다.

브와디스와프는 슐라흐타의 호감을 얻었지만, 아버지의 왕위 계승 계획(''vivente rege'')은 제브지도프스키의 반란(로코시)에서 좌절되었다.

1609년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의 개입이 격화되면서 왕가는 빌뉴스로 거주지를 이동했다. 15세의 브와디스와프는 혼란의 시대 동안 차르 바실리 슈이스키를 몰아낸 러시아 귀족 회의인 ''일곱 보야르''에 의해 차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출은 동방 정교회에서 로마 가톨릭로 모스크바 인구를 개종시키려던 아버지 지그문트 3세에 의해 무산되었다. 지그문트 3세는 브와디스와프의 정교회 개종을 거부하고,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섭정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제안하여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

어린 브와디스와프


1611-12년, 모스크바와 노브고로드에서 브와디스와프의 칭호인 ''모든 러시아의 차르이자 대공 브와디슬라프 지기몬토비치''가 새겨진 화폐가 주조되었다. 1610년 브와디스와프는 스타니스와프 죌키에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군과 함께 모스크바에 입성하여, 7인 보이아르 회의에 의해 새로운 차르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가 동방 정교회로 개종을 거부하고 양국 협상이 정체되는 동안, 전국 회의에서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 선출되었다(1613년).

1616년 브와디스와프는 차르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 원정을 조직했으나, 모스크바를 점령하지 못했다. 미하일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은 브와디스와프는 1617년모스크바 대공국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미하일의 구심력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고, 이듬해 1618년에는 데울리노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다. 비록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데울리노 휴전에서 체르니고프, 스몰렌스크를 비롯한 영토를 얻었지만, 브와디스와프는 러시아에서 통치할 수 없었고, 왕위는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지했다. 브와디스와프는 1634년까지 실질적인 권력 없이 차르 칭호를 유지했다.

1632년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공했지만, 부친의 사망으로 새 국왕으로 선출된 브와디스와프 4세는 폴란드군을 이끌고 이를 맞이했다(스몰렌스크 전쟁). 러시아는 진군에 실패했고, 1634년의 폴라노프 조약에서는 브와디스와프 4세가 1610년부터 칭했던 차르의 칭호를 포기하는 대신, 1618년에 합의된 국경선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으로 선출되기 전부터 여러 전투에 참여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1617년부터 1618년까지 러시아 원정에 참여했고, 1620년에는 폴란드-오스만 전쟁에 참전하여 호틴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체결된 평화 조약은 브와디스와프에게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라는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1623년에는 그단스크 근처에서 스웨덴 해군의 위협을 목격하기도 했다.

1624년부터 1625년까지 서유럽을 여행하며 군사 기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브레다에서 암브로지오 스피놀라를 만나 서구 군사 기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피렌체에서는 오페라에 감명을 받아 이를 폴란드에 도입하고자 했다. 제노바베네치아에서는 조선소에, 피사에서는 모의 해전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훗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해군 창설을 시도하게 된다.

폴란드로 돌아온 후 1626년 폴란드-스웨덴 전쟁에 참여했고, 1632년 아버지 지그문트 3세의 사망으로 왕위 선거를 통해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었다. 즉위 후 스몰렌스크 전쟁 (1632-1634)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폴라노프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를 확정했다.

스몰렌스크 전쟁에서 브와디스와프 4세는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보여주었으며, 서구식 포병과 요새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평화 조약을 갱신했다. 1635년에는 슈투름스도르프 휴전을 통해 스웨덴과의 분쟁을 종결하고 프로이센 영토를 되찾았다.

동란 시대에 7인 보이아르 회의에 의해 러시아 차르로 추대되기도 했던 브와디스와프 4세는 1634년 폴란드-러시아 간의 폴라노프 조약에서 차르 칭호를 포기하였다. 1637년에는 포메라니아 공국의 영토 분쟁으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북서 지역의 영토를 일부 상실하게 되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발칸 반도의 재기독교화를 꿈꾸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계획했지만, 슐라흐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반란이 일어났고, 같은 해 브와디스와프 4세는 사망했다.

브와디스와프 4세의 치세는 슐라흐타에 의해 왕권이 제한되었고, 절대주의를 지향하며 시도했던 여러 정책들은 실패로 끝났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황금 양모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합스부르크가에 형식적인 충성을 바쳤으며, 그들과의 관계는 비교적 강했다. 비록 프랑스와 같은 적들과의 협상도 꺼리지 않았지만, 1635년 리슐리외 추기경이 제안한 동맹과 전면전, 그리고 슐레지엔에서의 영토적 이득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했다. 이는 가톨릭 신자가 많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큰 불안을 야기하고, 세임을 통해 정책 변화를 밀어붙일 권한과 권력이 부족하며, 그로 인한 갈등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1636년부터 몇 년 동안 브와디스와프는 합스부르크가와의 유대를 강화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30년 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협상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스웨덴 왕위를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슈툼스도르프 휴전 이후 스웨덴 왕위 회복 전망이 어둡다는 것을 깨닫고, 1636년부터 1638년까지 연방 내에서 왕조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을 제안했다. 첫 번째 계획은 세습 영지 확보였으나 세임에서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황금 양모 기사단과 유사한 기사단 창설 시도 역시 슐라흐타와 마그나트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는데, 이들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광범위한 권력을 감소시킬 수 있는 모든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무역 관세 인상 계획 또한 귀족, 그단스크 (단치히) 상인, 시민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세임은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들을 통과시켜 왕권의 한계를 더욱 명확히 했다.

부왕 지그문트 3세동란 시대러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가운데, 1610년 브와디스와프는 7인 보이아르 회의에 의해 차르로 추대되었으나, 동방 정교회 개종 거부와 협상 정체로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 선출되었다. 브와디스와프는 1617년 모스크바 대공국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1618년 데울리노 휴전 조약으로 체르니고프, 스몰렌스크 등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1632년 러시아의 침공을 격퇴하고 1634년 폴라노프 조약에서 차르 칭호를 포기하는 대신 1618년 국경선을 확인받았다.

1635년 스툼스도르프 조약으로 스웨덴-폴란드 전쟁을 종식시키고 동프로이센 북안 스웨덴 수비대를 철수시켰으나, 리가 이북 리보니아 대부분은 되찾지 못했다. 스웨덴 왕위 포기 의사는 없었지만, 세임은 해군 증강 계획을 무산시키고 1641년 건조된 함선을 매각했다. 1637년 포메라니아 공국 지배 가문 단절 후 공국령 대부분이 스웨덴에 상속되어(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서반은 스웨덴, 동반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북서 지역을 상실했다.

발칸 반도 재기독교화를 꿈꾸며 오스만 제국 전쟁을 비밀리에 계획하고 우크라이나 코사크를 이용하려 했으나, 슐라흐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646년, 1647년 세임 결의).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 지휘 아래 코사크 반란이 일어났고, 브와디스와프 4세는 같은 달 병사했다.

브와디스와프 4세 치세는 슐라흐타에 의해 왕권이 제한되고 군사 행동이 저지된 시기였다. 왕권 강화를 위한 시도(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기사단 창설(1637년) 등)는 절대주의를 지향하는 국왕에 대한 슐라흐타의 거부 반응으로 실패했다. 의회 민주주의는 자유 거부권 남용으로 건전한 발전을 방해받았다. 브와디스와프 4세 시대, 다문화주의에 의한 사회 변화에 제도가 따라가지 못했고, 종교적으로는 반종교 개혁 흐름 속 칼뱅파 등 프로테스탄트 박해가 심해졌으며, 1647년 폴란드 형제단 학교와 인쇄소 폐쇄 명령이 내려졌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통치 초기 팔츠의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결혼을 추진했으나, 가톨릭 귀족과 교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동맹을 통해 왕권 강화를 꾀했다.

말년의 브와디스와프 4세


163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딸 오스트리아의 체칠리아 레나타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폴란드는 슐레지엔의 라치부시 공국과 오폴레 공국을 회복하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슐레지엔 공작령을 브와디스와프 4세의 아들에게 주는 것을 철회했다.

프란스 루이츠의 브와디스와프 4세 초상,


1644년 체칠리아 레나타가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 4세는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루드비카 마리아 곤자가와 재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 역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코사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1647년에는 그의 어린 아들 지그문트 카지미르마저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다.

결국 브와디스와프 4세는 적법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그의 동생 얀 2세 카지미에시가 왕위를 계승했다.

1648년 초 메르키네(메레츠)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중 브와디스와프는 담석증 또는 신장 결석을 앓았다. 국왕은 이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잘못된 약을 복용하면서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한 국왕은 유언을 받아 적게 한 다음 종부성사를 받았다. 브와디스와프는 1648년 5월 20일 새벽 2시경에 사망했다.

그의 심장과 내장은 빌뉴스 대성당의 성 카시미르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적법한 남자 상속자가 없었기에 그의 이복 형제인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가 뒤를 이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안나 아우스트리아와 지그문트 3세 바사의 결혼은 바사 왕조를 합스부르크 왕가와 연결하려는 정략결혼이었다. 브와디스와프는 1595년 6월 9일 크라쿠프 근처 워브주프의 국왕 여름 별장에서 태어났다.

브와디스와프의 어머니는 1598년 2월 10일에 사망했고, 그는 어머니의 궁정 시녀였던 우르술라 마이에린에게 양육되었다. 우르술라는 왕실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브와디스와프의 호프마이스터는 폴란드-프로이센 귀족인 미하우 코나르스키였다. 17세기 초, 브와디스와프가 마레크 웽트코프스키, 가브리엘 프로방유시, 안제이 숄드르스키, 지그문트 카자노프스키 등의 새로운 교사들을 얻으면서 우르술라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그의 교육은 피오트르 스카르가 신부가 설계했을 가능성이 높다. 브와디스와프는 크라쿠프 아카데미와 로마에서 공부했다.

10세 때, 그는 자신만의 왕자 궁정을 받았다. 그는 아담 카자노프스키, 스타니스와프 카자노프스키 형제와 우정을 쌓았다. 그는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이후 예술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를 구사했다.

브와디스와프는 슐라흐타의 호감을 얻었지만, 아버지의 왕위 계승 계획(''vivente rege'')은 제브지도프스키의 반란(로코시)에서 좌절되었다.

2. 2. 러시아 차르 선출과 모스크바 원정

1609년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의 개입이 격화되면서 왕가는 빌뉴스로 거주지를 이동했다. 15세의 브와디스와프는 혼란의 시대 동안 차르 바실리 슈이스키를 몰아낸 러시아 귀족 회의인 ''일곱 보야르''에 의해 차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출은 동방 정교회에서 로마 가톨릭로 모스크바 인구를 개종시키려던 아버지 지그문트 3세에 의해 무산되었다. 지그문트 3세는 브와디스와프의 정교회 개종을 거부하고,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섭정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제안하여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

1611-12년, 모스크바와 노브고로드에서 브와디스와프의 칭호인 ''모든 러시아의 차르이자 대공 브와디슬라프 지기몬토비치''가 새겨진 화폐가 주조되었다. 1610년 브와디스와프는 스타니스와프 죌키에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군과 함께 모스크바에 입성하여, 7인 보이아르 회의에 의해 새로운 차르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가 동방 정교회로 개종을 거부하고 양국 협상이 정체되는 동안, 전국 회의에서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 선출되었다(1613년).

1616년 브와디스와프는 차르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 원정을 조직했으나, 모스크바를 점령하지 못했다. 미하일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은 브와디스와프는 1617년모스크바 대공국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미하일의 구심력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고, 이듬해 1618년에는 데울리노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다. 비록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데울리노 휴전에서 체르니고프, 스몰렌스크를 비롯한 영토를 얻었지만, 브와디스와프는 러시아에서 통치할 수 없었고, 왕위는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지했다. 브와디스와프는 1634년까지 실질적인 권력 없이 차르 칭호를 유지했다.

1632년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공했지만, 부친의 사망으로 새 국왕으로 선출된 브와디스와프 4세는 폴란드군을 이끌고 이를 맞이했다(스몰렌스크 전쟁). 러시아는 진군에 실패했고, 1634년의 폴라노프 조약에서는 브와디스와프 4세가 1610년부터 칭했던 차르의 칭호를 포기하는 대신, 1618년에 합의된 국경선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2. 3. 폴란드 왕 즉위와 전쟁

브와디스와프 4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으로 선출되기 전부터 여러 전투에 참여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1617년부터 1618년까지 러시아 원정에 참여했고, 1620년에는 폴란드-오스만 전쟁에 참전하여 호틴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체결된 평화 조약은 브와디스와프에게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라는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1623년에는 그단스크 근처에서 스웨덴 해군의 위협을 목격하기도 했다.

1624년부터 1625년까지 서유럽을 여행하며 군사 기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브레다에서 암브로지오 스피놀라를 만나 서구 군사 기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피렌체에서는 오페라에 감명을 받아 이를 폴란드에 도입하고자 했다. 제노바베네치아에서는 조선소에, 피사에서는 모의 해전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훗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해군 창설을 시도하게 된다.

폴란드로 돌아온 후 1626년 폴란드-스웨덴 전쟁에 참여했고, 1632년 아버지 지그문트 3세의 사망으로 왕위 선거를 통해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었다. 즉위 후 스몰렌스크 전쟁 (1632-1634)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폴라노프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를 확정했다.

스몰렌스크 전쟁에서 브와디스와프 4세는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보여주었으며, 서구식 포병과 요새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평화 조약을 갱신했다. 1635년에는 슈투름스도르프 휴전을 통해 스웨덴과의 분쟁을 종결하고 프로이센 영토를 되찾았다.

동란 시대에 7인 보이아르 회의에 의해 러시아 차르로 추대되기도 했던 브와디스와프 4세는 1634년 폴란드-러시아 간의 폴라노프 조약에서 차르 칭호를 포기하였다. 1637년에는 포메라니아 공국의 영토 분쟁으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북서 지역의 영토를 일부 상실하게 되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발칸 반도의 재기독교화를 꿈꾸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계획했지만, 슐라흐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반란이 일어났고, 같은 해 브와디스와프 4세는 사망했다.

브와디스와프 4세의 치세는 슐라흐타에 의해 왕권이 제한되었고, 절대주의를 지향하며 시도했던 여러 정책들은 실패로 끝났다.

2. 4. 내치와 개혁 시도

브와디스와프 4세는 황금 양모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합스부르크가에 형식적인 충성을 바쳤으며, 그들과의 관계는 비교적 강했다. 비록 프랑스와 같은 적들과의 협상도 꺼리지 않았지만, 1635년 리슐리외 추기경이 제안한 동맹과 전면전, 그리고 슐레지엔에서의 영토적 이득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했다. 이는 가톨릭 신자가 많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큰 불안을 야기하고, 세임을 통해 정책 변화를 밀어붙일 권한과 권력이 부족하며, 그로 인한 갈등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1636년부터 몇 년 동안 브와디스와프는 합스부르크가와의 유대를 강화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30년 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협상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스웨덴 왕위를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슈툼스도르프 휴전 이후 스웨덴 왕위 회복 전망이 어둡다는 것을 깨닫고, 1636년부터 1638년까지 연방 내에서 왕조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을 제안했다. 첫 번째 계획은 세습 영지 확보였으나 세임에서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황금 양모 기사단과 유사한 기사단 창설 시도 역시 슐라흐타와 마그나트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는데, 이들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광범위한 권력을 감소시킬 수 있는 모든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무역 관세 인상 계획 또한 귀족, 그단스크 (단치히) 상인, 시민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세임은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들을 통과시켜 왕권의 한계를 더욱 명확히 했다.

부왕 지그문트 3세동란 시대러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가운데, 1610년 브와디스와프는 7인 보이아르 회의에 의해 차르로 추대되었으나, 동방 정교회 개종 거부와 협상 정체로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 선출되었다. 브와디스와프는 1617년 모스크바 대공국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1618년 데울리노 휴전 조약으로 체르니고프, 스몰렌스크 등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1632년 러시아의 침공을 격퇴하고 1634년 폴라노프 조약에서 차르 칭호를 포기하는 대신 1618년 국경선을 확인받았다.

1635년 스툼스도르프 조약으로 스웨덴-폴란드 전쟁을 종식시키고 동프로이센 북안 스웨덴 수비대를 철수시켰으나, 리가 이북 리보니아 대부분은 되찾지 못했다. 스웨덴 왕위 포기 의사는 없었지만, 세임은 해군 증강 계획을 무산시키고 1641년 건조된 함선을 매각했다. 1637년 포메라니아 공국 지배 가문 단절 후 공국령 대부분이 스웨덴에 상속되어(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서반은 스웨덴, 동반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북서 지역을 상실했다.

발칸 반도 재기독교화를 꿈꾸며 오스만 제국 전쟁을 비밀리에 계획하고 우크라이나 코사크를 이용하려 했으나, 슐라흐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646년, 1647년 세임 결의).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 지휘 아래 코사크 반란이 일어났고, 브와디스와프 4세는 같은 달 병사했다.

브와디스와프 4세 치세는 슐라흐타에 의해 왕권이 제한되고 군사 행동이 저지된 시기였다. 왕권 강화를 위한 시도(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기사단 창설(1637년) 등)는 절대주의를 지향하는 국왕에 대한 슐라흐타의 거부 반응으로 실패했다. 의회 민주주의는 자유 거부권 남용으로 건전한 발전을 방해받았다. 브와디스와프 4세 시대, 다문화주의에 의한 사회 변화에 제도가 따라가지 못했고, 종교적으로는 반종교 개혁 흐름 속 칼뱅파 등 프로테스탄트 박해가 심해졌으며, 1647년 폴란드 형제단 학교와 인쇄소 폐쇄 명령이 내려졌다.

2. 5. 결혼과 후계 문제

브와디스와프 4세는 통치 초기 팔츠의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결혼을 추진했으나, 가톨릭 귀족과 교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동맹을 통해 왕권 강화를 꾀했다.

163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딸 오스트리아의 체칠리아 레나타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폴란드는 슐레지엔의 라치부시 공국과 오폴레 공국을 회복하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슐레지엔 공작령을 브와디스와프 4세의 아들에게 주는 것을 철회했다.

1644년 체칠리아 레나타가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 4세는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루드비카 마리아 곤자가와 재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 역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코사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1647년에는 그의 어린 아들 지그문트 카지미르마저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다.

결국 브와디스와프 4세는 적법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그의 동생 얀 2세 카지미에시가 왕위를 계승했다.

2. 6. 사망

1648년 초 메르키네(메레츠)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중 브와디스와프는 담석증 또는 신장 결석을 앓았다. 국왕은 이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잘못된 약을 복용하면서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한 국왕은 유언을 받아 적게 한 다음 종부성사를 받았다. 브와디스와프는 1648년 5월 20일 새벽 2시경에 사망했다.

그의 심장과 내장은 빌뉴스 대성당의 성 카시미르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적법한 남자 상속자가 없었기에 그의 이복 형제인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가 뒤를 이었다.

3. 종교 정책

4. 문화 후원

러빙 컵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의, (Vienna)의 쿤스트히스토리셰스 미술관 소장


「브와디스와프 4세 기마상」루벤스 공방 (피터르 클라에스 데 소트만?) 제작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는 예술의 저명한 후원자였다.[2] 그는 예술, 특히 연극과 음악의 감정가였다. 여러 언어를 구사했고 역사 문학과 시를 즐겨 읽었다. 그림을 수집하여 바르샤바 성에 주목할 만한 그림 갤러리를 만들었다. 그는 중요한 이탈리아 및 플랑드르 바로크 회화 컬렉션을 수집했는데, 그 대부분은 그가 죽은 후의 전쟁에서 손실되었다. 그는 많은 음악가를 후원했고, 1637년에는 궁궐에 폴란드 최초의 극장인 최초의 원형 극장을 건설하여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수십 개의 오페라와 발레가 공연되었다. 그는 폴란드에 오페라라는 장르 자체를 도입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브와디스와프의 연극에 대한 관심은 이 예술 형식이 폴란드에 퍼지는 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시뿐만 아니라 지도 제작과 역사적 및 과학적 저작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브와디스와프가 후원하고 그의 왕실에 출석한 주목할 만한 화가 및 조각가로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 토마소 돌라벨라, 피터 댄커츠 데 리지, 빌헬름 혼디우스, 바르토미에이 스트로벨, 크리스티안 멜리히 등이 있다. 그의 왕실 오케스트라는 카펠마이스터 마르코 스카키가 이끌었고, 바르토미에이 펭키엘이 보좌했다.

그가 의뢰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바르샤바의 지그문트 3세 바사 기둥 건립이었다. 그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이 기둥은 이탈리아 출생 건축가 콘스탄티노 텐칼라와 조각가 클레멘테 몰리가 설계했으며, 다니엘 팀이 주조했다. 그는 장식 건축에는 관심이 덜했으며, 바르샤바에 두 개의 궁전, 즉 카자노프스키 궁전과 ''빌라 레기아'' 건설을 지원했다. 그가 후원하거나 그에게 헌정된 다른 작품으로는 귀도 레니의 ''유럽의 강탈''이 있다.[2]

5. 평가

브와디스와프 4세는 외향적이고 친근하며 유머 감각이 있는 낙천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사교적인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는 훌륭한 전술가이자 전략가로, 스몰렌스크 전쟁 등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그는 군대를 현대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서구식 보병 도입과 포병 확장에 힘썼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해군 창설을 시도하여 브와디스와보라는 새로운 항구 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비록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해군은 1640년대에 침몰하거나 도난당했지만, 그의 노력은 높이 평가받는다.

1637년 브와디스와프 4세의 러시아, 터키, 스웨덴 승리를 기념하는 메달


브와디스와프 4세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종교적으로 매우 관대하여 반종교개혁의 공격적인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폴란드 상원 내 개신교 의원 수는 증가했다.

지그문트 3세 바사 기둥, 브와디스와프 4세가 세움, 1644


그는 많은 계획(왕조, 전쟁, 영토 획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의 16년 통치 기간 동안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유럽 국가에 영구적인 외교 사절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지원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외교 정책을 개선했다.

반면, 그는 낭비벽이 심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왕실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썼다. 그는 또한 자신의 궁정들에게 많은 재산을 나누어주었는데, 궁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그들이 왕을 이용한다고 여겼다. 그는 결혼 기간을 포함하여 평생 동안 여러 명의 정부를 두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성격이 급하고 화가 나면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는 경향도 있었다.

브레스트 연합으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고, 라코우 아카데미 폐쇄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적 불관용의 흐름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추구했으나, 독립과 민주적 권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귀족(슈라흐타)들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의회인 세임은 왕의 권력을 견제하고 왕조적 야망을 제한하려 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를 한 가지 정책을 고수하지 못하고, 처음 겪는 어려움에 부딪히면 그것을 버리고 다른 기회를 찾는 몽상가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짧은 통치 기간과 약한 왕권이라는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5. 1. 긍정적 평가

브와디스와프 4세는 외향적이고 친근하며 유머 감각이 있는 낙천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사교적인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지만, 성격이 급하고 화가 나면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는 훌륭한 전술가이자 전략가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그는 군대를 현대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서구식 보병 도입과 포병 확장에 힘썼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해군 창설을 시도하여 브와디스와보라는 새로운 항구 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종교적으로 매우 관대하여 반종교개혁의 공격적인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폴란드 상원 내 개신교 의원 수는 증가했다. 그러나 브레스트 연합으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고, 라코우 아카데미 폐쇄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적 불관용의 흐름을 막지 못했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추구했으나, 귀족(szlachta)들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의회인 세임은 왕의 권력을 견제하고 왕조적 야망을 제한하려 했다.

몇몇 역사가들은 그를 몽상가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의 짧은 통치 기간과 약한 왕권이라는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5. 2. 부정적 평가

브와디스와프 4세는 낭비벽이 심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왕실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썼다. 그는 또한 자신의 궁정들에게 많은 재산을 나누어주었는데, 궁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그들이 왕을 이용한다고 여겼다. 그는 결혼 기간을 포함하여 평생 동안 여러 명의 정부를 두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외향적이고 친근하며 유머 감각이 있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묘사되었다. 반면에 그는 성격이 급했고 화가 나면 모든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매우 관대했고 반종교개혁의 더 공격적인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가 권력을 잡았을 때, 폴란드 상원에는 6명의 개신교 의원이 있었고, 그가 죽었을 때는 11명이 있었다. 종교 관용에 대한 그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브레스트 연합 분열에서 비롯된 갈등을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개신교에 대한 그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라코우 아카데미의 운명이나 종교 간의 국제적인 불화에서 나타나듯이, 폴란드와 해외에서 점점 더 커져가는 불관용의 흐름을 막지 못했다. 또한 그는 그가 존경하고 그의 계획에 의존했던 정교회 코사크에 대한 불화에 관여하지 않았다.

국내 정치에서 그는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이는 주로 독립과 민주적 권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귀족(슈라흐타)에 의해 좌절되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왕의 권력을 견제하고 그의 왕조적 야망을 제한하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임(의회)의 노력으로 인해 지속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브와디스와프를 한 가지 정책을 고수하지 못하고, 처음 겪는 어려움에 부딪히면 그것을 버리고 다른 기회를 찾는 몽상가로 보기도 한다.

5. 3.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참조

[1] 서적 Queen Liberty: The Concept of Freedom in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https://books.google[...] BRILL 2012-08-17
[2] 웹사이트 The Rape of Europa http://www.nationalg[...]
[3] 서적 ピョートル前夜のロシア 彩流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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